통사

Ⅱ. 대학의 설립과 초기 발전(1973~1980)

1. 아주대학교의 시작

  아주대학은 역사적으로 3개의 이름을 사용해 왔다. 1973년 3월에 개교한 2년제의 <아주공업초급대학>과 1974에 4년제로 승격한 뒤 사용한 <아주공과대학> 그리고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뒤 사용하기 시작한 <아주대학교>가 그것이다. 각각의 명칭은 각각 사용된 시기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아주대학교가 성장해 온 발자취를 보여준다.

 

  1) 아주공업초급대학 출범시기의 시대상황 
  아주대학이 공식 출범했던 1973년 3월을 전후한 한국의 상황은 희망과 절망, 기대와 저항 등 복합적 정서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아주대학이 출범했던 1973년 3월 1일 영국의 록밴드인 핑크 플로이드가 록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Dark Side of The Moon’이라는 제목의 이 록 앨범은 자본주의 황금시대를 거치면서 1960년대 후반에 폭풍같은 청년시대를 보냈던 젊은 영혼들의 좌절의 기록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관조하면서 <타임 Time>이라는 곡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3)


 3) 나무위키에서 인용함조용한 절망 속에서 인내하는 것이 영국의 방식이야  
시간은 가고 노래는 끝났네 
내가 더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유럽과 미국의 청년문화가 질풍노도의 저항에서 벗어나 좌절의 현실에 직면해야 했던 시점에 한국의 경기도 수원에서는 국제협력의 결과로 빚어진 한 작은 대학이 희망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한국 사회는 4공화국의 출범과 관련된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1969년 3선 개헌을 통해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게 된 박정희는 1971년 대선에서 승리했으나 종신집권을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갔다. 박정희는 1972년 7월 4일 온 국민을 들뜨게 했던 남북 공동성명을 통해 남북 간의 긴장 완화를 진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10월 17일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헌법을 중지시키고 국회 강제해산 등 비정상적 조치를 통해 “10월 유신”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궁정쿠데타에 가까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기구를 통한 간접 선거 형태로 대통령 선출제도를 변경하였다. 또 중임 및 연임 제한을 철폐해 무한정 집권이 가능한 체제를 완비했을 뿐 아니라 긴급조치 등 비정상적인 법체계를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최대 위기를 초래하였다. 
  유럽과 미국의 청년문화가 저항적 열풍에서 벗어나 현실에 대한 좌절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었던 시기, 한국에서는 한쪽에서는 경제성장에 대한 들뜬 감정들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어 하는 희망찬 기대로 표현되었으나 다른 한 편으로 70년대 들어서 진행되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청년 사회의 불안이 본격적으로 표출되는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복합적 시대 배경 속에 한국의 경기도 수원에서는 국제협력의 결과로서 한 작은 대학이 희망의 불씨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2) 아주대학교와 주변 경관의 변화 
  아주대학이 희망의 불꽃을 막 피워 올리던 시기에 대학 주변의 경관은 아직 황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림 2-1>의 항공사진4) 1960년대 아주대학이 위치할 원천동 산 5번지 일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농지와 개발되지 않은 산지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그림 2-1> 항공사진 오른쪽의 원천저수지 주변 역시 건물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4)이하 항공사진은 모두 수원시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받은 자료임

 

<그림 2-1> 1966년의 원천동 산 5-1번지표시된 부분은 산 5-1 지번(현 아주대학교 지번은 산 5번지)의 위치를 표시

 

<그림 2-2> 1974년의 원천동 산 5-1번지

  협궤 철도였던 수려선5)이 아주대학이 위치할 지역의 남쪽으로 지나고 화성역6)과 원천역7)을 연결하는 철로 북쪽 지역의 밭과 동산이 펼쳐진 지역에서 아주대학의 경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화성역과 원천역은 아주대학 설립 직전 해인 1972년 폐지되었으나 한동안 철로가 사라진 길은 도시계획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용되거나 일부는 한동안 골목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1974년 아주대가 출범한 직후의 모습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 2-2> 항공사진의 왼쪽 동수원지역과 아주대학, 아주대 입구 부분에 도시가 형성되고 있으며 오늘날 광교호수공원으로 정비된 원천저수지 주변에도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원천(먼 내를 의미)저수지는 “수상권(水上權)은 부근의 상인들에게 있었으나, 수하권(水下權)은 1973년 4월부터 아주대학에 임대되어 아주대학에서는 학교 운영을 위한 재정확보와 내수개발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73년 7월 약 70만 미의 잉어를 원천에 방류 양어를 하며, 1975년 4월부터 유료 낚시장으로 개장”하였다.8)  
  이 시기에 오면 “관개용수의 저수지에서 유흥지”로의 변화가 진행되어 원천저수지딸기철인 5~6월에는 방문객이 5만 명을 헤아리는 명소로 성장하면서 주변의 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면 수원의 도시적 경관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아주대학의 성장은 수원의 변화와 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국도에서 아주대학을 연결하는 도로가 정비되었던 것도 <그림 2-2>의 항공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림 2-3>의 항공사진은 21세기에 들어선 이후의 아주대와 그 주변의 수원 도시경관을 보여준다. 1970년대 전반에 비해서 도시성장이 얼마나 조밀하게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주대학 남쪽 시가 부분의 대부분은 건물로 채워져 있고 원천저수지 주변도 개발이 진행되어 아주대 주변 경관에 큰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수원시와 아주대학 경관의 외형적 영역이 거의 확정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2-3> 2000년의 원천동 산 5-1번지


1967년 도청의 수원 이전으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수원시는 아주대학이 공식 출범한 뒤 6개월여가 지난 1973년 9월 삼성전자가 본사를 수원으로 이전함으로써 도시경관 변화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아주대학교가 출범했던 1973년 수원의 인구는 불과 19만여 명이었으나 80년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증가하여 2002년에 백만 인구를 돌파하고 2022년 현재 119만여의 인구를 거느린 특례시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아주대학의 성장은 이러한 수원시의 성장과 비슷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5) 수원과 여주ㆍ이천을 연결. 일제가 여주ㆍ이천지역의 쌀을 수원을 통해 인천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건설했던 철도 
6) 오늘날 인계동지역. 2001 아울렛 수원점 지역 
7) 현 남부경찰서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위치 
8) 「수원풍물」, 아주공대학보, 제6호. 1975년 5월 24일. 4면

 

  3) 대학 경관의 형성 
  외교적 조치의 완결이 예상되고, 대학 설립 후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에 대한 불확실성이 제거되자 1972년 9월 20일 본관 교사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주로 이사장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소수의 인원에 의해 추진된 대학설립작업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토지확보, 재정기반 확립 등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서울대 캠퍼스의 관악산 이전 작업에 참여하고 있던 손승요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1972년 6월 공간계획의 작성을 완료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나선 결과 대학의 교사 건축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계획에는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을 전제로 한 대학 건물 건축과 고등학교9) 설립계획까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건설된 건물이 구 본관10) 1~4층, 학생회관 1층, 동관 1층, 서관 1~3층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구 본관과 서관 사이의 실험동 1층, 교택, 프랑스인 숙소 등이었다. 그러나 원래 대부분이 전답이었던 만큼 기초공사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현재의 원천관 건물인 구 본관은 길이가 100여 미터에 달하는 장대한 규모였으므로 세 토막의 건물을 ‘신축줄눈(Expansion Joint)’으로 연결하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짧은 시공 기간, 겨울 공사 등 어려움을 이겨내고 완성된 이 건물은 지금은 안정되었으나 한때 ‘부동침하’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었다. 
  한편 도시기반시설 자체가 열악한 상황에 있었으므로 외지에서 온 학생들의 경우, 마땅히 지낼 수 있는 숙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에 따라 대학 설립 초기부터 기숙사 문제는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었다. 학생회관 1층 식당에 임시로 베니어 칸막이를 이용하여 4인 1실, 24개 실에 96명을 수용하는 원천학사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기숙사가 문을 열었던 것은 불가피한 현실의 반영이었다. 이후 국고 지원으로 1975년 남제관을 건설하여 1976년까지 440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된 기숙사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개교를 위한 기본 설비의 준비는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9) 현 유신고등학교 
10) 현 원천관

 

  4) 초급대학 출범과 아주공과대학으로의 전환 
 

<그림 2-4> 아주공과대학 10개년 발전계획

  1974년에 작성된 <아주공과대학 10개년 종합 발전계획(1975~1984년)>에서 유신학원의 박창원 이사장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빛의 원천(源泉)은 대 아주인으로부터”라는 부제가 붙은 대학 설립 동기와 취지를 길게 밝히고 있는데, 대학 이름에 아시아를 의미하는 아주로 정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 문서의 설립이념 항목의 다항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세아 지역 제 우방국가 간의 문화 및 기술교류, 학생교류로써 상호 우호 증진에 기여한다.

  이러한 국제성에 대한 인식은 아주대학의 명칭과 대학 설립‧운영에 중요한 기본이념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이후 아주대학교 성장 과정에서 언제나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었다. 
  학교의 경관 건설 그리고 개교 준비를 위한 수많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간 별다른 직위 없이 업무를 수행해오던 김관호, 손승요(1972년 12월 5일 자) 교수가 아주대 역사상 최초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973년 2월 5일에는 김현남 박사를 학장으로 발령 내고, 1973년 2월 12일 9인의 교수를 임명함으로써 개교를 위한 기본적 조치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초기 설계자/건설자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아주공업초급대학은 3월 15일 입학식을 거행하고 입학생 279명(정원 280명)을 신입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미래를 향한 소박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1) 초기 교육체제 설계와 아주대학의 교육문화의 형성 
  정부의 대학 교육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주대학은 ‘고등교육 개혁의 시기’에 출범하였다. ‘경제 성장과 산업 수요를 위한 고등교육의 질적 변화를 도모하기 시작’했던 시기에 아주대학이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출범 초기에는 프랑스와의 협약이 강한 구속력을 가지고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므로, 대학의 교육과정이나 운영에서의 독립성을 유지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협정에는 학과 명칭과 학급 수, 학년 당 정원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있었으며, 교육과정 역시 부록에 명시되었다. 특히 불어교육을 강조하여 1학년 시기에 주당 5시간 실시를 명문화하고 있었다.11) 
  교육과정 전체에 프랑스의 관점이 개입할 수 있었다는 점은 새로운 선진 교육과정 운영 등을 참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으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어교육과 불어의 사용에 대한 프랑스 쪽의 요청이었다.  
  개교 2년여가 지난 1975년 10월 아주공대 학보의 <포커스>에서 불어교육에 대한 전반적 문제 제기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기사는 불어교육과 관련된 교수진, 실험실습 기자재 등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재학생들에게 불어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가”에 대해 회의적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 유학이라는 매력적인 유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은 “졸업 후 당장 당면하게 될” 취업 시험에서 불어가 활용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불어교육을 부담스러워하고, 생활 불어/과학 불어 등 과목편성과 수준별 수업 형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외국어 교육체제에서 불어는 활용도가 낮은 언어에 속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유산이었던 독일어 교육, 현실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하는 영어 교육을 제외하고 다른 언어교육을 수행하는 중등학교나 대학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언어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실용적 현실적 차원에서 선택되는 것이므로, 제1외국어로서의 영어를 제외한 모든 외국어는 상황에 따라 교육과정에서 요동치는 경향이 있어 왔고, 불어 역시 교육 과정상의 선택 영역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필수영역에서는 학생들의 지지를 얻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아주공업초급대학은 단기간의 준비를 거쳐 신입생을 선발해야 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280명 정원에 279명이 등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최초 합격자의 이탈로 인한 추가 합격자 선발을 거치면서 학생 수준의 저하를 피하기 어려웠으므로, 입학과 동시에 철저한 학사관리를 위한 교육체계를 건설하는데 교수들의 노력이 집중되었다. 수업시간 엄수, 수시시험 강화, 체험교육 체계화 등 당시 대학들에 만연해 있던 느슨한 수업 관리와는 매우 다른 엄격한 학사관리가 시도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간 단위로 담당 교수가 학생들의 출결 상황을 정리한 내용을 보고하게 하는 결석 보고제도, 1/5 이상 결석 시 해당 교과목의 성적 무효 처리, 낙제 과목이 3과목 이상이거나 평점이 2.0(D+) 이하 학생들에 대한 학사경고, 2회 연속 학사경고를 받은 학생은 제적 처분 등의 제도가 있었다.  
  이러한 제도의 시행 결과 1년 뒤에는 32명의 학생이 탈락하여 재학생 수가 247명으로 감소했다. 거의 학생들의 등록금에 의존하여 학교를 운영하는 상당수의 사립대학에서는 재정적인 이유로 학사관리를 엄격하게 시행하지 않았으나, 개교 초의 아주공대는 학장의 철학과 재단의 협조하에 엄격한 학사관리를 시행하여 정착시킴으로써 아주대학교 교육문화 형성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 상당수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가 도입된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명문화되었던 학사경고와 유급 및 제적 제도를 아주대학에서는 설립 초기부터 시행함으로써 1969년 설립되어 신흥 명문대로 떠오르고 있던 서강대와 함께 학사관리를 엄격하게 시행하는 대학으로서의 평판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아주대학교 교육문화 전통의 출발이 되었다. 


 11) 8
 

  (2) 아주공과대학으로의 전환과 실험대학 참여 
  대학 체제가 정비되고, 대학 구성원들의 열정으로 어느 정도 대학 운영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원래의 숙원이었던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협력 대상인 프랑스 정부의 양해가 필요했으므로 당시의 재단 이사장은 10월 프랑스를 방문하여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과 학생 수 증원 등에 대한 의견을 프랑스 정부 측에 제시하였고, 그해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불회담을 통하여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에 대한 외교적 장애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한 합의에 기초하여 문교부는 1973년 12월 22일 4년제 아주공과대학으로 개편을 인가한다는 통보를 아주대학 측에 전달하였다. 아주공업초급대학의 교수와 학생을 그대로 승계하고, 발효화학과는 화학공학과로, 정밀기계학과는 기계공학과로 명칭을 바꾸고 정원 각 120명으로 증원하였다. 4개 과 10개 전공 입학정원 480명의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이 완료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74년에 맞은 개교 1주년은 아주 공과대학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실질적 개교의 의미를 내외에 천명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짧은 시간 정신없이 준비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학생을 선발하고 정리되지 않은 캠퍼스 안에서 시작했던 대학은 이제 4년제 공과대학으로서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본격적인 명문사학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아주대학이 출범했던 시기인 1970년대 초의 대학에 대한 국가정책은 1960년대 후반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의 정부 정책은 “대학의 양적팽창에 제동”을 걸고 정원정책을 강화하는 정비와 통제에 초점을 맞추는 흐름 속에 있었다. 1966년 <대학학생정원령>과 학위 등록제의 시행, 1968년 <대학입학예비고사령>의 시행 등은 모두 그러한 경향의 반영이었다. 사립대학들의 비정상적 학위 남발 등의 상황과 대학이 “우골탑”이라고 불렸던 현실을 국가 개입을 통해 통제하는 데 역점을 둔 정책들이었다.12) 

  1950년대 후반 이후의 사립대학에 나타난 각종 잡부금 형태의 학비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사립대학들의 학위 남발은 대학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었다. 그러한 현실을 관리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이 1960년대 이후 대학에 대한 정부 정책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학 학사관리 정상화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 정부는 대학 교육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이 과거와 구분되는 점은 정책의 일률적 강제가 아니라 지원대학 선정이라는 일종의 경쟁체제 도입의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부의 정책 의도는 1973년 ‘실험대학’의 도입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160학점이었던 졸업학점의 140학점으로의 감축과 계열별 모집을 위한 모집 단위의 광역화, 능력별 졸업제도, 복수전공제 등의 시행을 목표로 한 실험대학 체제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양적 성장만을 추구해 온 대학들에게 새로운 학사 운영 혁신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충분한 재정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 실험대학은 실제로는 이수학점의 감축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성과를 냈다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정부의 정책기록해설집에 따르면 “1974년부터는 대학의 특성화가 추진되어, 대학 사이의 역할과 기능의 분담, 특성화 프로그램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주대학은 이러한 정부 정책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1974년 실험대학 참여를 결정하였다. 실험대학 참여와 관련된 설명에서 당시 교무처장은 아주대학의 인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 본 대학은 공과대학으로서 지신충용(智信忠勇)을 겸비한 사회인으로서 국가관이 확립된 엔지니어  
나. 창의력을 계발하여 자기 분야의 전문지식으로 자력으로 응용할 수 있는 유능한 엔지니어  
다. 단일 전공을 지양하고 복수전공제를 채택함으로써 사회에 기여도를 높이는 봉사하는 엔지니어

  그는 이러한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입생의 계열별 모집을 시행하고13), 160학점이던 졸업학점을 140학점으로 낮추며, 부전공제를 도입 ‘상호 관련성 있는 인접 분야의 전공지식을 가지고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게 하며, 능력별 졸업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와 함께 도서관의 확충, 실험실습장의 확충, 교수요목14)의 고지 등 교육 방법의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이미 학사경고제도, 성취 능력에 따른 수강 신청의 제한, 출결 보고제도, 지도교수제, 교수요목 작성 등을 시행하고 있던 설립 초기의 아주대학에서는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기존의 정책을 내실화, 확충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므로 개교 1년 만에 실험대학 신청에 나설 수 있었다. 15)

  이러한 학교의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한 학사관리 체제는 다소간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구성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개교 초의 식목일 행사에서부터 적극적 참여로 표출되었고, 교수들은 열정적으로 학생 지도에 나서, 1974년을 회고하면서 김현남 학장은 “단일 공과대학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는 자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때의 경험은 1995년 이후 아주대학의 혁신과정에서도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다. 
 


12) <정책기록해설집> 참조 
13) 2학년 진학 시 전공선택 
14) 현재의 수업계획서 
15) 김관호, <미래의 아주 실험대학에의 길. 교육방법 개선방안에 대하여>, 아주공대학보 1974년 8월 10일. 제2면. 국한문 혼용으로 발간되었으나, 이 글에서는 한글로 바꾸어 인용하였음. 이하 동일

 

  (3) 아주 대학 문화의 형성 
  이 시기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형성 중에 있던 수원 도시경관의 영향 하에 있었으므로, 학교에서의 생활을 제외하고는 원천유원지에서 배를 타거나 근처 딸기밭에서 휴식을 하는 등의 여가생활을 보내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활동이 가능한 상황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버스를 타고 전철 역에서 가서 전철로 갈아탄 다음 학교까지 가는 기나긴 여정을 보내야 했던 많은 학생들에게 스쿨버스는 아직까지는 미래의 꿈이었다. 1974년 전후 시기의 아주대학은 아직 그러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상황에 있지 않았다. 
 

<그림 2-5> 아주공대학보 제7호. 3면 광고. 1975년 6월 20일자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 편의를 위해 기숙사 시설을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기숙사 선호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엄격한 학생관리체제가 작동하고 있었으므로, 학생들은 기숙사에 들어가기보다는 근처 마을에서의 하숙을 선호했고, 여러 제약 속에 있던 고등학교의 삶에서 벗어나서 독립적 생활을 하게 된 그들에게는 해방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림 2-5>는 현재의 우만아파트 지역에 위치했던 초원지대라는 딸기 카페(?)의 광고이다. 이 광고는 대학 주변이 아직 도시화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공간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제한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생각이 변화하고 있었음은 “청년문화” 등 70년대에 전개되었던 논쟁의 와중에서 「장발예찬론」이라는 글을 학보에 발표한 한 신입생의 도발적 문제 제기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세대 차이를 “단발과 장발”로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길면 도망가는 자요, 짧으면 쫓아가는 자”라고 정리한다. 그래서 그는 “도대체 자르면 그만이요, 기르면 우리에게는 약간의 박해는 있을지라도 그만인 머리카락이 왜 이리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일까?”라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기성세대는 “머리 자르기에 중독되어 있”어서 “그들의 자식벌 되는 사람들에게까지 가위질하는데 매력을 느끼는” 존재로 정의되었다.16) 
  그보다 1년 전쯤인 1974년 7월 1일 아주공대학보 2호의 사설에서는 ‘카운터 컬쳐’로서의 청년문화를 이해하면서도 그 현상에 내재된 문제들을 청년, 교수 등의 문제로 가져와서 독서/교양 등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장발예찬론>은 바로 그러한 어른들의 상투적 관점에 대한 통렬한 반응이기도 했다.  
  아주대학생들은 사회와 공동체 문제를 고민하는 열혈 청년들이기도 했다. 1974년 11월 12일 아주대학생 “4백여 명이 수업을 마치고 서관 앞에 모여 현시국에 대한 지성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학생의 자세를 천명하는 <구국선언문>을 낭독하고 ‘구속학생 석방하라’는 등 4개 항의 결의사항을 채택한 후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 약 1㎞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벌이다가 긴급출동한 경찰과 대치 투석전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4시간 만에 해산된 이 시위에서 24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고, 10여 명의 학생은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 사태로 인하여 학교는 냉각기를 갖기 위해 2주간의 휴강 기간을 가진 후 속강하여 한 학기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청년의 열정과 현실에 대한 그들이 인식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표출되었던 것이다.


16) 장정원, <장발예찬론>, 아주공대학보 제6호, 1975년 5월 24일자

 

<그림 2-6> 아주공대학보 제6호(1975년 6월 20일자)
<그림 2-7> 아주공대학보 제9호(1975년 9월 12일자)

  하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학생들을 괴롭혔던 문제는 다른 문제였다. <그림 2-6>은 모호하게 표현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등록금 인상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그것은 <그림 2-7>에서 보다 분명히 묘사된다. 가방 가득히 돈(등록금)을 넣고 가는 학생과 그것을 독서의 계절인 가을에 책으로 착각한 기자의 코멘트에 분노한 학생의 발차기는 등록금과 대학의 실존적 현실의 관계에 대한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1973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등록금은 신입생을 기준으로 매년 인상률이 24%, 36%, 29% 등이었고 입학금도 비슷한 수준으로 인상되고 있었으므로 학생들이 느끼는 등록금 압박은 상당히 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2020년 물가를 100으로 했을 때 아주대학교가 출범했던 1973년 3월의 물가는 5.961이었다. 1인당 국민 총소득(GNI)을 기준으로 보면 1973년은 16만 2,000원(406.2달러)이었는데 비해 2021년은 40,481만 원(35,373달러)이었고 가계총처분가능소득(PGD)은 1975년 23만 1,000원(477.1달러 통계청자료가 이때부터 존재)이었음에 비해 2021년은 2,118만 5,000원(17,953달러)이었다. 17) 

  그러면 등록금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개교 당시의 등록금은 7만 5,500원에 입학금이 3만 원 추가되어 신입생의 등록금은 10만 5,500원에 달하고 있었다. 통계청 자료가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의 PDG를 기준으로 보면 1975년의 등록금은 12만 8,000원이고 입학금은 4만 7,000원 신입생 기준 17만 5,000원이었으므로 총처분가능소득의 76%가 소요된 셈이다. 이것은 2021년의 같은 공학계 등록금이 442만 6천 원으로 총처분가능소득의 대략 21%를 점하는 점과 비교하면 대학 등록금이 당시 한국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보다 분명히 떠오른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가계소득의 대부분을 쏟아 넣어야 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면 등록금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개교 당시의 등록금은 7만 5,500원에 입학금이 3만 원 추가되어 신입생의 등록금은 10만 5,500원에 달하고 있었다. 통계청 자료가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의 PDG를 기준으로 보면 1975년의 등록금은 12만 8,000원이고 입학금은 4만 7,000원 신입생 기준 17만 5,000원이었으므로 총처분가능소득의 76%가 소요된 셈이다. 이것은 2021년의 같은 공학계 등록금이 442만 6천 원으로 총처분가능소득의 대략 21%를 점하는 점과 비교하면 대학 등록금이 당시 한국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보다 분명히 떠오른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가계소득의 대부분을 쏟아 넣어야 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초에 우리의 희망과 의지야 어쨌든 우리는 아주 역사의 밑바닥에 보람과 회한으로 점철된 1974년의 한 단을 쌓아 올렸다.” 18)

  아주공과대학으로 첫해를 보낸 1년을 마무리하면서 학보 사설에서는 보람과 함께 회한을 말하고 있었다. 대학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거의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던 당시 구성원들의 어려움은 여러 가지로 표출되고 있었다. 1974년을 마무리하는 신구학생회 집행부의 좌담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제가 볼 때 우리 학교 학생은 다소 패기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너무 점잔을 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배우는 교과 내용에 대해 다른 학교와 비교해서 이렇다할 기준을 못잡고 있어 불안감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중략-학생들은 학교 측에서 확실한 제시가 없으므로 학교에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스터 플랜을 보면서도 과연 이 것이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불안감을 갖는데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의 책임 한계 등 확립해 나가면 이런 문제는 해결이 되겠지요.-중략-학교에 들어올 때에는 전인교육의 실시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들어와 보니 학생과 교수 사이에는 너무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고교생을 다루는 식이라는 느낌이 듭니다.-중략-교수와 학생 간의 분위기가 딱딱하고 교수들은 너무 위엄을 찾는 것 같습니다. 교수와 학생이 핵이 되어 한데 뭉쳤으면 합니다.” 19)
17) 여기에서 사용된 숫자는 통계청에서 제공하는 자료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임 
18) 「역사창조의 의지와 시련-한 해를 보내며-」, 아주대학보(1974년 12월 18일자) 
19) 「신구회장단에 듣는다-특집 좌담회-」, 아주대학보(1974년 12월 18일자)  

 

  엄격한 학사관리 체제, 교수 · 학생 간의 소통 경험의 부재에서 파생되는 문제 등과 출발 초기 대학이 갖는 어려움, 특히 선배들의 부재로 인한 또래 집단 간의 전승되는 전통이 없다는 사실은 학생들의 대학 생활 적응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학생들의 이러한 경향은 오늘의 아주대에서도 어느 정도 들리는 말들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이 아주대 전통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아주대학의 지역사회와의 관계문제가 하나의 이슈로 학생 측에서 제기되었던 점도 흥미롭다. 이 문제에 대해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학교의 위치는 틀림없이 수원시 원천동이다. 그러나 가끔 보면 수원을 스스로 무시하고 서울 중심인 경향이 학교에 많은 것 같다. 학생들에게도 이런 의식이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학교 행정에서도 이를 느낄 때가 많다.”20)

  당시 예비고사의 지역대학 응시 제한 제도로 인하여 아주대학의 신입생들은 경인 · 서울 지역 학생들이 모두였고, 특히 서울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으며 교수들도 상당수는 서울에서 출퇴근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으로 인하여 학교가 서울 지향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아주대학의 출범 시기부터 수원 지역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은 바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지역사회를 중시하는 정책이 집행되어야 했으나,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고, 그 점은 지역사회와의 연결고리를 확장시키는데 장애가 될 수 있었다. 


20) 「독자의 소리,-편중된 학교 처사 시정을-」, 아주대학보(1975년 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