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그땐 그랬지 에피소드 공모전 수상작
( 공모기간 : 2022.11.15 ~ 2023.01.11 )

나를 품어 준 아주의
‘요람’, 원천학사

정치외교학과 91학번 류○

영어 교과서에 쓰인 ‘Freshman’ 제목처럼 푸릇한 신입생으로 수업 후 동기, 선배와 어울리는 시간이 마냥 좋았지만, 수원역행 셔틀버스 밤 9시 막차 시간은 나에게 통금시간이나 진배없었다.

특히 많은 과제나 시험을 앞두고서는 전철 1호선의 양끝단인 수원역과 청량리역을 왕복하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반면 승차장을 향해 내달리던 내 뒤로 슬리퍼를 끌면서 기숙사로 올라가던 동기의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다음 학기에는 꼭 입사하리라 다짐했다. 결국, 여름방학 끝자락에 큰 배낭을 메고 4인 1실을 쓰던 신관(현 용지관)으로 입사하던 첫날, 방원들은 누가 올지 걱정이 되면서 설레기도 했다. 당시 남자 기숙사 방은 ‘원천 내무반’이라 소문날 만큼 방장, 부방장 복학생 선배들의 성향에 따라 한 한기 생활이 결정되었고 한 학년 선배인 방중형을 잘 만나면 꽃피는 캠퍼스 생활을 즐길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첫 방장으로 만난 영문학과 85학번 송○찬 형은 지금도 보고 싶은 사람이다. 너무나도 다이내믹한 본인의 군시절 경험을 얼마나 맛깔나게 풀어내는지 저녁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또 나의 앳된 고민과 학교생활의 여러 어려움을 챙겨주고 먼저 대화를 걸어주는 방장 형의 관심은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별다른 먹거리가 없던 그 시절 기숙사에서는 매일 밤 라면파티가 있었고, 그 조리는 방졸의 몫이었다. 빠른 라면 배달을 명받은 방졸끼리 모이던 한밤의 취사장은 서로 간의 방 분위기와 방장 형이 전날 한턱낸 통닭 한 마리와 맥주 회식이나 법원사거리 앞 뷔페 외식 이야기 등이 꽃을 피웠다. 난 아직도 물리학과와 기계공학과 방졸 간에 라면을 끓일 때, 처음부터 물만 넣는 것과 라면 수프를 같이 넣는 것 중 어느 것이 끓는 점이 낮은지 각자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동원하여 토론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지금도 어느 것이 맞는지 궁금하다. 


어느덧 방중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라면 양은냄비도 하얗게 빛바랠 즈음 나도 첫 방졸 후배를 받았다. 제주 출신의 기계공학과이던 방졸은 내게 새로운 지역문화와 함께 지역 소외감을 토로했는데 사뭇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난 이 방졸과 함께 주말에도 같이 지내면서 서울 강남도 구경 다니고 재미있게 지내려 했다. 


방학 중에도 기숙사 잔류를 신청해서 어학원 수강과 교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나에게는 기숙사는 집보다 편한 곳으로 나만의 사색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울적할 때는 같은 기숙사 친구들의 방으로 서로 놀러 가며 라면도 먹고, 학교 앞 비디오 방으로 최신 작을 같이 보러 가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원천학사 사생회 주관 대동제 중(1992)


다른 사람들은 오래된 구관(현 남제관)을 덜 선호했지만 난 3인 1실의 아담한 구관이 더 좋았다. 특히 벌집 모양의 구조도 특이했고, 건물 중정에서 방원들과 음식을 같이 나눠 먹으며 서로의 공부내용과 고민을 이야기하고 다독이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묵은 이불과 빨래를 구관 옥상에 널고 학교 풍경을 바라보면 내 품 안에 다 넣은 것처럼 좋았다. 기숙사 자습실에서 공부하다 건물을 흔드는 환호성과 진동에 책을 내던지고 TV 시청실로 합류해 중계되는 모교의 축구경기를 함께 응원하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지금도 기억 한편에 선명한 모습들이 있다. 강의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옷만 걸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방장과 자체 휴강을 선언하고 침대에서 안 나오던 방졸, 전화 왔다는 방송 스피커 소리에 샤워하다 아랫도리만 수건으로 대충 가리고 복도 공용전화를 받던 부방장 목소리에선 여자 친구와 주말 데이트 약속을 잡은 들뜸이 보였다. 옆을 지나가는 우리는 괜히 화장실 사용 소리를 크게 내며 시샘했다(외부에서 사생과 연락할 시에는 신관의 경우 각 방에 전화기가 있어 건물 관리실로 전화를 걸면 경비아저씨가 해당 방으로 바로 연결해줬으나 구관의 경우는 복도 공용전화로 연결받았다.).


지금도 남초 학교인 우리 학교이지만 그때는 8,000명이 안 되는 전교생 중 여학생은 2,000여 명이 채 안 되어 마초적인 면이 강했다. 찬 바람이 부는 2학기가 되면 공대를 중심으로 많은 복학생이 군시절에 입던 야전상의를 마치 유니폼처럼 입고 다녀서 하루하루가 예비군 훈련 날인 듯했다. 기말고사 무렵 중앙도서관 열람실 의자 뒤로 쭉 걸려 있던 육해공 병장 계급장이 부착된 야전상의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이런 칙칙한 학교 분위기에 일침을 놓던 기계공학과 90학번 선배 말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 선배는 공대생으로는 드물게 작은 옷장이 부족할 만큼 많은 옷과 몇 종류의 화장품도 갖다 놓고 꾸밈에 노력하던 서울 강남 출신의 멋쟁이였다. “사람의 경쟁력 중 하나로 ‘세련됨’도 중요하다.”라며 내게도 꾸미고 다니라고 종종 말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수년 후 취업 면접을 준비하며 거울 앞에 선 어색하고 개성 없는 내 모습을 볼 때야 그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이후에 나도 방장이 되어 이전 방장 형들로부터 받은 배려와 관심을 방원들에게 돌려주려 애를 썼다. 그 덕분에 졸업 후 늦게 들어간 군대에서 방졸이었던 환경공학과 후배로부터 몸조심하라는 편지와 함께 두꺼운 양말 몇 켤레가 담긴 소포를 받는 작은 기쁨도 누렸다. 돌이켜 보면 다양한 지역과 학과 출신의 선후배들과 공간과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경험은 아닐 것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라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대학 기숙사는 단순히 숙소 기능만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대학이 해외 유수의 대학을 벤치마킹해 ‘레지덴셜 칼리지(Residential College)’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 학교 기숙사는 분명 학습과 생활이 통합된 창의적인 공동체 교육으로 레지덴셜 칼리지의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이들 학교처럼 신입생만 공동체 생활하는 것이 아닌 학년과 학과가 골고루 섞인 ‘아주 레지덴셜 칼리지’를 만들면 좋겠다.           
지금도 기숙사 창으로 따뜻한 저녁 노을이 비치는 가운데 방에 들어선 내게 부스스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장 형 왔어요?”라며 인사하던 방졸의 모습이 너무 그립고 소중하기만 하다. 

 

용지관 전경(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