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세계를 이끄는 최고의 대학을 향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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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980
대학의 설립과 초기 발전
초급대학으로 출범하여 수원에 뿌리 내린 후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여 내실을 다져온 시기
아주대학 탄생은 1965년 체결된 ‘한불 문화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에 기초해 거의 10년에 가깝게 이어진 한불 협력의 성과이다.매우 특이한 사례였다. 대한민국 대부분 사립대학이
설립자의 주관적 목적의식에 따라 출범했음을 감안할 때, 아주대학은 정부 간 협정이라는 외부적 조건이 결국 대학 설립으로까지 이어진 희귀한 케이스였다.
1969년 11월 교하학원 법인 설립이 인가되었고, 프랑스와의 협력 의미를 살려 ‘서교공과대학’이라는 명칭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교하학원이 초급대학 운영의 어려움, 이사장의 사업 실패와 도미(渡美)
등을 이유로 대학 설립을 포기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이에 유신고속관광(주)가 새로운 재단 설립의 주체로 선정되어 교하학원을 인수했고 재단 명칭도 회사 이름을 본떠 ‘유신학원’으로 변경했다. 또
출범이 예정된 대학의 이름도 ‘아주공업초급대학’으로 변경되어 최종 승인되었다.
이후 1972년 12월 29일 ‘한불기술초급대학 설립을 위한 협정’이 공식적으로 공포됨에 따라
아주대학교 출범 절차가 모두 일단락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말 그대로 황무지였다. 이 시기는 무엇보다 논밭 위에 건물을 세우고 길을 만들어 대학 경관을 창조한 시기였다. 불과 몇 개월 만에 강의실과 학생 및 교수를 위한 숙소 등을
건설해야 했으나, 토지 매입과 강제수용 과정은 지역주민의 희사, 수원시 대학유치위원회의 지원 등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 빠르게 진행되었다. 더불어 프랑스 지원 덕분에 최신 실험ㆍ실습 설비를
갖추고 첫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최초 초급대학(현 전문대학)으로 출범했으나 1년 뒤 바로 4년제 공과대학으로의 승격이 이뤄졌다. 재단 교직원과 학생을 포함한 초기 구성원들의 개척자적 열정 덕분이었다. 이에 초기 운영의
기틀을 완성하며 4년제 공과대학으로 새로운 출발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 규모가 확대되며 유신학원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새로운 재단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던 차에 1977년 들어 대우학원이 출범하며 대학 발전의 모멘텀이
마련되었다. 이후 과감한 인력 충원과 공간 확충이 실현되며 종합대학 도약을 위한 기초역량이 갖춰졌다. 또 당시 대우학원이 대학 운영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함으로써 대외 신뢰도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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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1999
대학의 도약과 성장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후 그에 걸맞은 대학체제를 마련하고 명실(名實)을 갖춘 종합대학, 신흥명문사학으로 발전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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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은 종합대학 승격의 해였다. 그간 공대 중심으로 운영되던 아주대학교는 경영대학·인문사회대학·문리대학 신설을 거쳐 이후 인문대학·사회대학으로 발전적 분화를 이뤄나갔다. 또
문리대학에 속해 있던 자연과학대학을 이과대학으로 분리하며 기초학문 체계를 정립했다.
1980년대 후반에도 학과 증설에 따른 단과대학 단위의 체제 개편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갔다. 특히 1987년에는 문리과대학을 자연대학과 문과대학으로 분리했고, 사회과학대학에는 심리학과와 사회학과,
그리고 정치외교학과를 신설했다. 또한 같은 해 공과대학에는 건축과와 토목공학과를 신설했으며 이밖에도 기존 전공에서 분리해 신설한 여러 전공이 있었다.
이 시기 아주대학교의 최대 화두 중 하나는 병원 및 의과대학의 신설문제였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1988년 의과대학 설립이라는 결실을 거뒀으나 그 과정에서 파열음도 생겨났다.자원배분
문제가 불거지며 교수사회의 비판의식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서 진행 중이던 민주화 물결이 아주대학교에도 영향을 미쳐 1987년 8월에는 85명 교수가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한
‘교수협의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 협의회 출범을 계기로 아주대학 교수들은 투표를 통해 재단 결정에 집단적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창구를 얻게 되었다. 이에 더해 1988년 3월 노동조합이 결성되며
학교 임직원들 역시 자신들의 의견을 대외에 표명할 수 있는 기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아주대학교의 위상 제고를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에 이 시기 부임한 김덕중 총장의 대대적인 개혁작업은 구성원들의 지지 속에 진행될 수 있었다.
특히 탈경계 교육, 교수업적 평가제의 도입, 입시설명회 개최 등으로 대표되는 수요자 중심 대학체제 개편정책은 아주대학교 내부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 모았다. 따라서
당시의 아주대학교는 ‘대학 개혁’의 상징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성이 표류를 거듭하며 구성원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중앙관직에 나갔던 전임 총장이 어떠한 동의 절차도 없이 총장 자리에 재취임하는 일이 벌어지며 갈등이 고조되었다. 대학
공공성에 대한 구성원들의 의구심을 키웠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대우가 해체되며 갑작스럽게 재정문제가 불거졌다. 이에 아주대학교 구성원들은 강력한 지도력의 시대를 정리하고 주체적
참여를 통해 새로운 대학사회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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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11
대학의 시련과 자립 발전의 기반 확립
변화와 혁신의 시기인 21세기를 맞아 대학 운영의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자립 발전의 기반을 구축한 시기
최대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대학 운영 패러다임을 전환시켜 나간 시기였다. 대학 구성원들만의 노력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자립 발전의
기반을 확립했다는 측면에서 홀로서기의 가능성을 확인한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들어 무엇보다 아주대학교 발전의 상징적 지표와도 같던 ‘대우’가 몰락했다. 아직 재정적 바탕이나 사회적 평판 측면에서 열세에 처해 있던 대학이었음에도 후견 기업의 존재가 대학 인지도 상승의
큰 이점으로 작용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의 해체로 인해 이러한 이점을 상실하고 독자적인 역량만으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색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반복된 내부 갈등도 실마리를 찾기 어렵게 한 요인 중 하나였다. 특히 학내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선출된 총장이 재임기간 중 무리한 정책을 펼치다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중도 사퇴하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했다. 이에 방향성을 잃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위기를 수차례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주대학교 구성원들은 때로 토론하고, 때로는 상대를 설득하며 대학 성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나갔다. 특히 2003년 이후로는 대학 운영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핵심가치들을
정리하고 구체화해 ‘아주비전 4U’을 대외에 공표했다. 이로써 아주대학은 교육과 연구 부분의 적절한 조화를 지향하는 ‘연구에 기반을 둔 교육 중시 대학’을 목표로 설정하고, 시대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바탕으로 고유의 문화를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체계적인 비전과 발전계획 수립 이후로는 대학의 기본역량 향상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 나갔다. 조직 정비와 교원평가제도 보완, 교육 관련 시스템 정비 등을 통해 더욱 합리적인 운영체계를 정립했고
법학전문대학원ㆍ약학대학ㆍ간호대학 등을 신설하며 양적 확대의 측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실현했다. 이처럼
새로운 교육 단위의 출현을 스스로의 힘으로 현실화시킴으로써 아주대학교는 자체 역량만으로도 충분히 순항할 수 있음을 대내외에 증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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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현재
지속 가능 대학건설과 새로운 발전 방향의 모색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일군 50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 새로운 50년을 준비하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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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이래 ‘실용성을 중시하는 대학’의 전통을 다져 왔으나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사회 변화 속에서 새로운 발전경로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였다.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며, 과거 50년 동안 쌓아온 성과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50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였다.
위기는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인구의 급격한 감소에 따른 대학의 존립 위기, 지식체계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대학교육 체제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 팬데믹과 장기불황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졸업생들의 진로
설정에 관한 문제 등 여러 도전과제들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에 아주대학교 구성원들은 과거처럼 현상 대응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사회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아주대학교는 이 시기, 과거처럼 발전에 초점을 두기보다 대학이 지켜야 할 본질의 회복에 집중하며 학생들의 주도적 학습과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파란 학기’, 어려운 학생들의 해외연수를
지원하는 ‘After You’ 등의 혁신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시행해 나갔다. 또 교내 구성원만이 아니라 학생과 동문, 그리고 지역주민과 지자체 구성원들과의 연결과 공유를 꿈꾸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연결지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학’을 표방했다.
이 시기 아주대학교 총장들과 집행부들이 세운 비전에는,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 대학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산학연 협력, 소통, 국제화, 연구 허브 구축 등 표현은 다양했으나 새로운
대학 생태계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모두가 공유했다.
이처럼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고 해결해야 할 숙제도 산적한 상황이다. 그러나 아주대학교는 그 50년의 역사를 통해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을 이뤄내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이처럼 불굴(不屈)의 모습을 끊임없이 내재화한 결과, 개교 50주년을 맞은 현재 11개 단과대학과 의료원을 거느린 명문 대학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의 출현과 마음으로 연결된 집단지성의 발현을 통해 안과 밖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50년을 넘어 ‘100년 아주’를 완성해 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