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북
part7. 아주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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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욱 마크애니 대표(공업경영학과 78)
“아주대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의 전환점”
공업경영학과(현 산업공학과) 78학번인 최종욱 대표는 정보보안 분야의 중견기업인 마크애니를 운영하고 있다.
마크애니는 국내 소프트업계 최대 규모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해외 공략에도 성공했다. 형님의 권유로 입학한
아주대학교는 최종욱 대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수요일마다 진행되던 특강에서 시대의 선각자들을 마주하며 견문을 넓혔고
‘세계는 너의 무대’라는 가슴 벅찬 졸업식사를 들으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경영정보시스템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그는 한국과학기술원의 연구실장,
상명대 교수를 거쳐 대학 내 벤처로 마크애니를 창업했다.
그때 아주대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고향에서 과수원 농사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학보사 기자로도 활동했던 최종욱 대표는 2021년 아주대학교의 연구력 증진을 위해 5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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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모 아이티센그룹 회장(물리학과 88)
“공부보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았던 학창 시절”
1988년 강진모 회장은 아주대학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입학하자마자 받은 학사경고로 장학금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공부보다 궁금한 게 더 많았던 강진모 회장의 대학생활은
그룹사운드 베이시스트, 과외, 신발공장, 유리창 닦기, 공사장 등
작지만 다양한 도전으로 가득했다.
학사경고와 맞바꾼 수많은 도전과 경험, 그 속에서 맺은 관계는
2005년 아이티센을 설립하는데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아이티센은 2014년 코스닥에 상장, 이후 활발한 인수합병으로 연 매출 4조 원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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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범 현 엔젤식스플러스 대표, 전 엘지전자 사장(기계공학과 73)
“아주대학과의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일지도”
신문범 대표는 아주대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아버지의 추천으로 재수 학원 등록까지 마친 그는 아주공업초급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막 설립된 학교의 발전 가능성을 알아챈 아버지의 선견지명 덕이었다.
선배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대학생활은 신문범 대표에게 도전이었다.
살아남겠다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부딪혔다.
졸업 후 1978년 현대건설 입사를 시작으로 1986년 엘지전자(구 금성사)로 옮긴 뒤
독일, 중동, 아프리카, 인도 등 다양한 해외 경험을 거치고 엘지전자 중국법인 사장을 역임했다.
3년간의 엘지스포츠 재임을 끝으로 2018년 은퇴하고,
LG계열사의 전임 CEO들과 엔젤식스플러스를 공동 설립했다.
다양한 경험과 경영 철학 등을 바탕으로 도움이 필요한 혁신형 기업의 창업과 육성을 전문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후배를 위해 써달라며 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하고
2015년 경영인 부문 ‘자랑스런 아주인상’을 수상했다.
2021년에는 40년 넘는 직장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영서 <더빅윈(THE BIG WIN)>을 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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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훈 배우(심리학과 00)
“학생의 꿈을 응원해주는 자랑스러운 아주대학교”
2000년에 아주대학교 심리학과에 입학한 김지훈은
2002년 KBS 드라마 ‘러빙유’로 데뷔했다. 데뷔 이후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나가며 2014년 ‘왔다! 장보리’로 MBC 연기대상
연속극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김지훈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학교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공부와 연기 생활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촬영 스케줄로 수업에 불참하는 날엔 밤을 새워 리포트를 써 제출했다.
실제로 심리학 공부는 연기에도 큰 도움을 주었고, 그런 그를 학과 교수님과 동기들은 응원했다.
그 응원과 지지 덕분에 훌륭한 배우로 성장했고, 최근까지도 MBC 예능 ‘나혼자산다’,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집 : 공동경제구역’, ‘연애대전’에 출연하며 연기와 예능
두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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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암 영월곤충박물관장(공업경영학과 75)
“원천학사에서 한국인 최초의 혜성 발견자가 되겠다는 꿈을 꿨다”
곤충박물관에서 별을 보는 건축학과 교수.
바로 이대암 영월곤충박물관장을 칭하는 말이다.
이대암 관장은 건축학과가 생긴다는 홍보책자 속 글귀 하나만 믿고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아주공대학 공업경영학과(현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때까지 건축학과는 개설되지 않았고 집안 사정도 어려워져 끼니를 굶는 게 다반사였다.
동기들이 구내식당으로 몰려갈 때 굶주리는 시간을 버티기 위해 학교 뒷산에서 나비를 잡았다.
동시에 원천학사에서 생활할 때 1919년 일본에서 혜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인 최초로 혜성을 발견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 후 그는 홍익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 호주 시드니대학교에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세경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교수와 부총장을 역임했다.
부총장을 그만두고는 영월에 곤충박물관을 세웠다.
그리고 박물관 옥상에서 한국인 최초로 혜성을 발견했다.
원천학사에서 혜성 발견자가 되겠다는 꿈을 꾼 지 34년 만에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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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축구선수(경영학과 94)
“아주대학교는 국가대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
국가대표 축수선수로 활동했던 안정환은
잘 알려진 아주대학교 출신 중 한 명이다. 안정환은 현역시절
뛰어난 볼 컨트롤과 정교한 슈팅으로 데뷔 때부터 뛰어나 ‘판타지스타’로 불렸다.
1994년 안정환이 아주대학교에 입학한 후 중하위권이었던 축구부는
대학리그 최정상 팀으로 우뚝 섰다. 1997년 추계대학축구연맹전 우승 스토리는
아직도 회자되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안정환은 시칠리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시차 적응할 틈도 없이 대학축구연맹전 후반전에 투입됐다.
스코어는 1:2. 한 골 차로 전년도 우승팀이었던 홍익대가 앞서가며 경기의 흐름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후반전 안정환은 투입 이후 1분 만에 두 골을 터뜨리며 기세는 역전됐고
아주대학교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K리그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며 유럽 리그로 진출,
2002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우리나라 국민들의 영원한 ‘반지의 제왕’이 되었다.
아주대학교는 국가대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말하는 안정환은 직접 총장실을 찾아
축구부 후배들을 위해 2천만 원 상당의 물품을 후원하기도 했다. 현재는 축구해설위원 겸
방송인으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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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 외상의학과 전문의(의학과 88)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1기생”
1988년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이국종 교수는 의과대학 1기생이다.
부속병원도 의대 전용 건물도 없던 시절 학교를 다녔다.
1995년 의과대학 졸업 이후 아주대학교에서 의학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외상외과 분야에 발을 들였다.
이후 매일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자 애썼다.
2011년에는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되어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을 치료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척박한 중증외상 의료현실 속에서 힘겹게 국제 표준의 외상센터 기준을 세우는데 공헌을 했다.
이국종 교수는 2014년 11월부터 2020년 1월까지 권역외상센터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외상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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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주 아주대 축구부 감독(경영학과 86)
“즐겁게 훈련할 수 있었던 건 학교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
1990년 아주대학교를 졸업한 하석주 감독은
2010년 아주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돌아왔다. 부임 첫해, 아주대학교 축구부는
제12회 전국대학축구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줬고 다음 해에는 1~2학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K리그 감독으로 이적한 하석주 감독은 2015년 다시 아주대학교로 돌아왔다.
아주대학교 축구부 감독과 동시에 2022년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며
SBS 연예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아주대학교의 축구부를 든든하게
책임지고 있으며, 2022년에는 제58회 추계대학축구연맹전 태백산기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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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필상 구원장학재단 설립자(기계공학과 73)
“사랑합시다! 줍시다! 100년 인생도 순간이라오!”
황필상 박사의 삶은 늘 도전이었다. 고난의 순간들도 많았다.
그러나 부딪히고 깨지는 순간에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버티고 일어났다.
청계천 인근 판자촌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가난했다.
부모님이 직조기 몇 대와 양을 기르며 7남매를 키웠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유배달과 막노동을 시작했다.
군대를 제대한 뒤에도 밥벌이를 위해 이력서를 들고 여러 회사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낮에는 이력서를 들고 회사를 전전하고, 밤에는 책상에 앉아 공부했다.
직장도 구해지지 않고 공부도 되지 않는 날엔 죽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러기를 1년, 황필상 박사는 스물 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아주대학교 1회 입학생이 되었다.
대학교 입학 후 그의 인생은 늘 도전이었다.
장학생으로 학업을 마쳤으며 지도교수의 권유로 1978년 1월 결혼식을 올린해에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낯선 타국에서 6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교수가 된다.
8년 정도 학생들과 함께 했던 그는 안정적인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사업가의 길에 도전한다.
‘수원교차로’라는 생활지를 창간한 것이다. 회사는 날이 갈수록 성장했다.
회사를 경영 한 지 10년, 그는 200억원대 자산가로 우뚝 섰다.
“넘쳐나는 것은 언제든 덜어내야죠. 넘치는 재물이 부담스러워 사회에 환원하는 것뿐입니다”
프랑스 국비 유학생, 대한민국의 명문대 교수, 200억 자산을 가진 사업가.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경력과 부(富)를 가졌던 그는 돌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금 가진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2002년 7월 수원교차로 200억 상당의 회사 주식 100%를 모교인 아주대학교에 기부하겠다고 결정했다. 그의 뜻을 받아 아주대학교는 황필상 박사와 함께 ‘황필상 아주
장학재단’을 세웠다. 지금은 황필상 박사의 아버지 ‘황윤구’와 어머니 ‘조복원’ 성함의 한 글자씩을 가져와 ‘구원장학재단’ 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자라나는 학생들과 이웃, 사회를 위해 헌신하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온다. 세무서에서 세금 140억 원을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온 것. 세무서는 그가 세운 장학재단이 재산을
편법으로 상속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100억 원의 증여세와 5년간의 가산세를 부과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자신과 같이 어려운 환경을 겪는 학생들이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사회의 젊은이를 길러내는 것이 남은 사명(使命)이라 생각하는 마음으로 설립한 재단이었다.
이듬해 황필상 박사는 세금 부과 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 세무서는 가족에게 경제력 승계 위험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항소했고 법원은 세무서의 손을 들어줬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싸움은 8년 넘게 이어졌다. 2017년 4월 20일, 대법원은 황필상 박사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하고, 이 땅의 젊은이를 위한다는 그의 진심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판결이 끝나고 쏟아지는 질문에도 ‘긴 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큰 힘이 되어준 변호인단 덕’이라며 주변인을 치켜세웠다.
“힘들수록 힘을 빼고 버티는 거야”
기자회견을 마친 그가 뱉은 말이었다. 돈도 없이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며 그가 터득한 지혜라 했다. 힘이 들수록 힘을 빼는 것. 그 마음으로 스물 일곱 만학도로 아주대학교에 입학했다. 소송이 길어지며
그라고 왜 속이 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그럴수록 힘을 빼고 버텼다. 언젠가는 법원도 사람들도 자신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 장학재단이 설립된 이후 2022년까지 3,845명의 학생이
70억 원이 넘는 장학금을 받았다. 그의 진심이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2018년 12월 31일, 그는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그는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주고 갔다. 아주대병원에 그의 시신이 기증된 것. 그는 아주대학교 1기 졸업생이기도 하지만 1994년
개원한 아주대학교의 시신 기증을 처음으로 약속한 기증 서약자이기도 하다. 아주대학교의 모든 시작을 함께한 그는 마지막까지 아주대학교와 함께였다. 그리고 여전히 아주대학교와 함께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아주인사이트 2019 겨울호’에 게재된 유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유서(遺書)
거의 3년 동안 생각만 하고 있던 일을 이제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현하려 하니 자뭇 엄숙해집니다. 매일 쓰고 싶었던 유서, 이렇게 정리해봅니다.
하나, 내가 죽거든 내 시신 중 필요한 부분은 필요한 사람에게 주시오! 내가 그동안 너무 혹사시켰기에 남은 부분의 상태가 얼마나 양호할런지는 나도 모르겠소만, 그래도 그나마 쓸만한 게 있다면 아낌없이
주시오! 그러고도 남는 부분이 있다면 흔적도 없이 태우시오! 그래도 한 줌 재로 남거든 대한민국 어디든지 뿌리고 내 흔적은 조금도 남기지 마시오!
내가 남기는 그 어떤 물질도 나를 위해 쓰지 말고 남을 위해 쓰시오. 단 한 장의 종이까지도. 그리고 나도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했기에 못난 대한민국이 안타까워 울기도 했다고 말해주시오.
둘, 사랑하는 내 딸들!
내가 너희들에게 줄 것은 정신밖에 없다. 세상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도 없다. 마음을 비울수록 그만큼 너희들의 장래가 밝아진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기 바란다. 너희들도 언젠가는 늙을
것이니 젊어서부터 노후를 준비해라. 주어진 일에 감사하면서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라. 창의력을 키워라! 용기를 잃지 마라! 책을 읽어라! 시간을 아껴라!
그리고 여력이 있거든 인정을 베풀어라! 착해라! 남을 위해서도 살아라!
나도 내 방법대로는 너희들을 사랑했지만 너희들이 많이 불편했을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인간은 단련을 통해서 더욱 성숙되는 것이니 내 방법에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라.
크고 넓게 생각해라!
셋, 내 이웃이여!
사랑합시다. 줍시다. 국가가 잘 살도록 헌신합시다.
100년 인생도 순간이라오!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하는 아내!
모든 면에서 당신보다 못한 나를 만나 사람 만드느라 고생했소! 미안하고 정말 고맙소.
황필상